검은 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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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鬼)를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 그들과 소통하는 자도 있는 조선시대. 궁궐 번을 제외한 나머지 궁인 모두 깊은 잠에 빠진 축시. (오전 1시경) 귀도 아니고 인간은 더더욱 아닌 천계(天界)의 영물, 무명이 뒷짐을 지고 느릿느릿 영제교로 걸었다. 사자 갈기를 닮은 머리카락, 전신을 촘촘히 뒤덮은 푸른 비늘. 그가 입은 흑 도복 소맷자락과 바짓단이 삭아서 너덜너덜했다. 인간과 매한가지로 머리와 몸통, 팔다리가 달렸지만 특이한 외형이었다. 인간화한 무명의 모습을 만약 인간이 눈으로 볼 수 있다면, 마물이라며 까무러치고도 남을 테였다. 고즈넉한 영제교 아래. 졸졸 흐르는 물소리. 진즉 누가 따라붙은 걸 알았지만 그냥 내버려 두었다. 미행하는 자에게서 사악한 기운이 느껴지지 않아서였다. 무명이 자신의 쉼터에 손을 얹은 바로 그때였다. “물을 다스리는 영수라 들었소.” 낮은 중저음의 목소리에 무명이 뒤돌아섰다. 어둠에서 달빛으로 걸어 나온 자가 이윽고 무명의 곁으로 다가왔다. 왠지 낯이 익은 얼굴…. 그를 훑어보는 무명의 눈매가 일순 가늘어졌다. “동묵이라 하오.” 검은 도포에 봉두난발의 비루한 몰골이지만, 어렴풋이나마 알아볼 수 있었다. 체구가 비록 작대기처럼 비썩 말라버렸어도 또렷한 이목구비만은 쉬 잊힐 게 아니었기 때문이다. 예전의 헌칠했던 용모는 온데간데없고, 눈 아래까지 시커먼 그늘이 져 있었다. 지독하게 메마른 사내가 당장 쓰러질 것 같은 기색으로, 그늘 가득한 눈을 들어 말했다. “그대가 누굴 좀 죽여줘야겠소.” * 비정기 연재

귀(鬼)를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 그들과 소통하는 자도 있는 조선시대. 궁궐 번을 제외한 나머지 궁인 모두 깊은 잠에 빠진 축시. (오전 1시경) 귀도 아니고 인간은 더더욱 아닌 천계(天界)의 영물, 무명이 뒷짐을 지고 느릿느릿 영제교로 걸었다. 사자 갈기를 닮은 머리카락, 전신을 촘촘히 뒤덮은 푸른 비늘. 그가 입은 흑 도복 소맷자락과 바짓단이 삭아서 너덜너덜했다. 인간과 매한가지로 머리와 몸통, 팔다리가 달렸지만 특이한 외형이었다. 인간화한 무명의 모습을 만약 인간이 눈으로 볼 수 있다면, 마물이라며 까무러치고도 남을 테였다. 고즈넉한 영제교 아래. 졸졸 흐르는 물소리. 진즉 누가 따라붙은 걸 알았지만 그냥 내버려 두었다. 미행하는 자에게서 사악한 기운이 느껴지지 않아서였다. 무명이 자신의 쉼터에 손을 얹은 바로 그때였다. “물을 다스리는 영수라 들었소.” 낮은 중저음의 목소리에 무명이 뒤돌아섰다. 어둠에서 달빛으로 걸어 나온 자가 이윽고 무명의 곁으로 다가왔다. 왠지 낯이 익은 얼굴…. 그를 훑어보는 무명의 눈매가 일순 가늘어졌다. “동묵이라 하오.” 검은 도포에 봉두난발의 비루한 몰골이지만, 어렴풋이나마 알아볼 수 있었다. 체구가 비록 작대기처럼 비썩 말라버렸어도 또렷한 이목구비만은 쉬 잊힐 게 아니었기 때문이다. 예전의 헌칠했던 용모는 온데간데없고, 눈 아래까지 시커먼 그늘이 져 있었다. 지독하게 메마른 사내가 당장 쓰러질 것 같은 기색으로, 그늘 가득한 눈을 들어 말했다. “그대가 누굴 좀 죽여줘야겠소.” * 비정기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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