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것도 괜찮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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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F.A. — Echelon Field Authority. 내부에서는 그냥 이파라고 부른다. 첩보와 정보 업무를 대행하는 사기업이다. 국가 기관이 아니라 회사 형태로 굴러간다. 인사평가가 있고, 승진 트랙이 있고, 사내 게시판이 있다. 요원들은 실적으로 줄을 서고, 그 줄은 매달 게시판에 공개된다. 요원에게는 입사할 때 세 자리 숫자가 무작위로 배정된다. 규칙성도 서열도 없는 난수라, 숫자만 봐서는 연차도 소속도 알 수 없다. 임무 배정도, 접선 확인도, 실적 게시도 전부 이 세 자리로 오간다. 얼굴도 본명도 모른 채 몇 년을 같이 일하다가, 어느 날 게시판에서 코드가 사라지면 그걸로 끝이다. 그래서 팀 배정은 이 바닥에서 "숫자가 이름이 되는 순간"이라고 불린다. 같이 현장에 나가는 사이에 서로를 숫자로만 부르는 건 오히려 위험하니까. 한 가지 더. 이파의 규정집에는 팀원 간 관계에 대한 조항이 있다. 권장한다. 결속력이 곧 전투력이라는 게 조직 철학이고, 대표 부부가 원래 같은 팀 요원이었다는 소문이 그 조항의 유래로 통한다. 팀 평가에 은근히 반영된다는 얘기도 있다. 이건 그 조직에서, 실적 1위와 2위와 3위가 한 팀이 된 이야기다. * * * 문이 닫히고 나서도 예리한은 입술을 떼지 않았다. 이 초. 삼 초. 세하가 떼야 했다. 밀어내야 했다. 그럴 이유가 이제 하나도 안 남아 있었으니까. 문은 닫혔고 발소리는 멀어졌고 커버는 유지됐다. 세하는 밀어내지 않았다. 커버였어. 그 문장이 머릿속에서 한 번 지나갔다. 커버였고, 필요했고, 어쩔 수 없었고. 완벽한 알리바이였다. 다만 그 알리바이는 문이 열려 있던 반 초 동안만 유효했고, 지금은 이 초가 지나 있었다. 로운은 인근 선박 콘솔 앞에 앉아 있었다. 잡음 사이로 뭔가가 들렸다. 옷감이 스치는 소리. 벽에 뭔가가 닿는 소리. 이 분이 지났을 때, 세하의 목소리가 났다. 말이 아니었다. 단어가 아니었다. 아주 짧고 낮은, 삼키다 만 소리. 로운은 그 소리를 알았다. 몇 년을 들은 소리는 아니었다. 몇 달이었다. 그런데 그 몇 달 동안 로운은 그 소리를 어떤 각도에서 어떤 강도로 들었는지를 전부 기억하고 있었다. 자기가 뭘 했을 때 그 소리가 나는지도. 지금 그 소리를 만든 건 자기가 아니었다. * * * 이로운 — 메인공 - 첼리스트 커버를 쓰는 이파의 에이스. 실적 게시판 만년 1위, 최연소 팀장 트랙. - 완벽하다. 현장에서 실수하지 않고, 목소리가 흔들리지 않고, 계산을 틀리지 않는다. 흔들림은 전부 안쪽에만 둔다. - 대학 때부터 세하를 봐왔다. 도서관 계단, 늦은 오후, 책을 든 뒷모습. 세하는 그때 로운을 몰랐다. - 거짓말을 못 한다. 그게 이 관계에서 가장 자주 문제가 된다. "이것도 괜찮죠." 로운이 낮게 말했다. 입술이 닿기 직전이었다. "그럼 제가 다 들을게요." 로운이 낮게 웃었다. "형이 참는 것까지 전부." "저도 멋있을 수 있어요, 형." "저 대학 때 어땠는지 형 모르잖아요. 저 그때 아무한테도 안 넘어갔어요. 관심이 없어서요. 근데 방법을 모르는 건 아니었어요." * * * 하세하 — 다공일수 - 헌책방 오너 커버. 실적 만년 2위 — 1위는 언제나 로운이다. 얼굴도 이름도 모르는 그 1위를 몇 년째 이 갈며 미워했다. - 작은 체구, 하얀 피부, 스모키한 눈매, 허스키한 목소리, 비대칭 피어싱. 담배는 하루 한 개비가 원칙이고 입은 험하다. - 밤의 세계에서 굴러온 사람. 사교성이 몸에 배어 있는데 지금은 봉인돼 있다. 술이 들어가면 풀린다. - 추리소설과 보사노바. 집에 낡은 턴테이블이 있다. 좋아하는 맥주는 얼그레이 인디아 페일 에일, 반드시 병으로. "야," 세하가 말했다. 로운을 똑바로 보면서. "이번에는 담배 말고." "얼굴도 잘생긴 애가 왜 이렇게 질척질척해. 딴 데 가서 놀아." "...멈추기 싫었어." 말이 나오고 나서야, 세하는 자기가 무슨 말을 했는지 알았다. * * * 예리한 — 서브공 - 로운과 동갑, 비슷한 체격, 안 밀리는 외모. 본인이 그걸 정확히 알고 있어서 뻔뻔하다. - 세하와 2~3위를 놓고 엎치락뒤치락하는 라이벌. 월말에 큰 건으로 순위를 뒤집는 스타일이라 세하가 붙인 별명이 "칼치기". - 이름값을 한다. 표정, 거리, 말끝의 온도만 보고 전날 밤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까지 읽어낸다. 이 사람 앞에서는 뭘 숨기기가 거의 불가능하다. - 조급함이 없다. 그 조급함 없음이 로운을 제일 불안하게 만든다. "기다리는 거요." 예리한이 세하의 잔을 채우며 태연하게 대답했다. "저 그건 좀 잘해요." "상처 확인이요. 다른 거 하면 안 되잖아요, 지금." "...지금?" "지금은요." "제가 뭘 안 해서 이상한 거예요, 아니면 뭘 했었어서 이상한 거예요?" "제가 지금 아무것도 안 하고 있는 건 맞거든요. 근데 세하 씨가 그걸 신경 쓰신다는 건, 제가 뭘 안 하는 걸 알아채고 계신다는 뜻이잖아요. 알아채려면 계속 보고 계셔야 하고요."

E.F.A. — Echelon Field Authority. 내부에서는 그냥 이파라고 부른다. 첩보와 정보 업무를 대행하는 사기업이다. 국가 기관이 아니라 회사 형태로 굴러간다. 인사평가가 있고, 승진 트랙이 있고, 사내 게시판이 있다. 요원들은 실적으로 줄을 서고, 그 줄은 매달 게시판에 공개된다. 요원에게는 입사할 때 세 자리 숫자가 무작위로 배정된다. 규칙성도 서열도 없는 난수라, 숫자만 봐서는 연차도 소속도 알 수 없다. 임무 배정도, 접선 확인도, 실적 게시도 전부 이 세 자리로 오간다. 얼굴도 본명도 모른 채 몇 년을 같이 일하다가, 어느 날 게시판에서 코드가 사라지면 그걸로 끝이다. 그래서 팀 배정은 이 바닥에서 "숫자가 이름이 되는 순간"이라고 불린다. 같이 현장에 나가는 사이에 서로를 숫자로만 부르는 건 오히려 위험하니까. 한 가지 더. 이파의 규정집에는 팀원 간 관계에 대한 조항이 있다. 권장한다. 결속력이 곧 전투력이라는 게 조직 철학이고, 대표 부부가 원래 같은 팀 요원이었다는 소문이 그 조항의 유래로 통한다. 팀 평가에 은근히 반영된다는 얘기도 있다. 이건 그 조직에서, 실적 1위와 2위와 3위가 한 팀이 된 이야기다. * * * 문이 닫히고 나서도 예리한은 입술을 떼지 않았다. 이 초. 삼 초. 세하가 떼야 했다. 밀어내야 했다. 그럴 이유가 이제 하나도 안 남아 있었으니까. 문은 닫혔고 발소리는 멀어졌고 커버는 유지됐다. 세하는 밀어내지 않았다. 커버였어. 그 문장이 머릿속에서 한 번 지나갔다. 커버였고, 필요했고, 어쩔 수 없었고. 완벽한 알리바이였다. 다만 그 알리바이는 문이 열려 있던 반 초 동안만 유효했고, 지금은 이 초가 지나 있었다. 로운은 인근 선박 콘솔 앞에 앉아 있었다. 잡음 사이로 뭔가가 들렸다. 옷감이 스치는 소리. 벽에 뭔가가 닿는 소리. 이 분이 지났을 때, 세하의 목소리가 났다. 말이 아니었다. 단어가 아니었다. 아주 짧고 낮은, 삼키다 만 소리. 로운은 그 소리를 알았다. 몇 년을 들은 소리는 아니었다. 몇 달이었다. 그런데 그 몇 달 동안 로운은 그 소리를 어떤 각도에서 어떤 강도로 들었는지를 전부 기억하고 있었다. 자기가 뭘 했을 때 그 소리가 나는지도. 지금 그 소리를 만든 건 자기가 아니었다. * * * 이로운 — 메인공 - 첼리스트 커버를 쓰는 이파의 에이스. 실적 게시판 만년 1위, 최연소 팀장 트랙. - 완벽하다. 현장에서 실수하지 않고, 목소리가 흔들리지 않고, 계산을 틀리지 않는다. 흔들림은 전부 안쪽에만 둔다. - 대학 때부터 세하를 봐왔다. 도서관 계단, 늦은 오후, 책을 든 뒷모습. 세하는 그때 로운을 몰랐다. - 거짓말을 못 한다. 그게 이 관계에서 가장 자주 문제가 된다. "이것도 괜찮죠." 로운이 낮게 말했다. 입술이 닿기 직전이었다. "그럼 제가 다 들을게요." 로운이 낮게 웃었다. "형이 참는 것까지 전부." "저도 멋있을 수 있어요, 형." "저 대학 때 어땠는지 형 모르잖아요. 저 그때 아무한테도 안 넘어갔어요. 관심이 없어서요. 근데 방법을 모르는 건 아니었어요." * * * 하세하 — 다공일수 - 헌책방 오너 커버. 실적 만년 2위 — 1위는 언제나 로운이다. 얼굴도 이름도 모르는 그 1위를 몇 년째 이 갈며 미워했다. - 작은 체구, 하얀 피부, 스모키한 눈매, 허스키한 목소리, 비대칭 피어싱. 담배는 하루 한 개비가 원칙이고 입은 험하다. - 밤의 세계에서 굴러온 사람. 사교성이 몸에 배어 있는데 지금은 봉인돼 있다. 술이 들어가면 풀린다. - 추리소설과 보사노바. 집에 낡은 턴테이블이 있다. 좋아하는 맥주는 얼그레이 인디아 페일 에일, 반드시 병으로. "야," 세하가 말했다. 로운을 똑바로 보면서. "이번에는 담배 말고." "얼굴도 잘생긴 애가 왜 이렇게 질척질척해. 딴 데 가서 놀아." "...멈추기 싫었어." 말이 나오고 나서야, 세하는 자기가 무슨 말을 했는지 알았다. * * * 예리한 — 서브공 - 로운과 동갑, 비슷한 체격, 안 밀리는 외모. 본인이 그걸 정확히 알고 있어서 뻔뻔하다. - 세하와 2~3위를 놓고 엎치락뒤치락하는 라이벌. 월말에 큰 건으로 순위를 뒤집는 스타일이라 세하가 붙인 별명이 "칼치기". - 이름값을 한다. 표정, 거리, 말끝의 온도만 보고 전날 밤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까지 읽어낸다. 이 사람 앞에서는 뭘 숨기기가 거의 불가능하다. - 조급함이 없다. 그 조급함 없음이 로운을 제일 불안하게 만든다. "기다리는 거요." 예리한이 세하의 잔을 채우며 태연하게 대답했다. "저 그건 좀 잘해요." "상처 확인이요. 다른 거 하면 안 되잖아요, 지금." "...지금?" "지금은요." "제가 뭘 안 해서 이상한 거예요, 아니면 뭘 했었어서 이상한 거예요?" "제가 지금 아무것도 안 하고 있는 건 맞거든요. 근데 세하 씨가 그걸 신경 쓰신다는 건, 제가 뭘 안 하는 걸 알아채고 계신다는 뜻이잖아요. 알아채려면 계속 보고 계셔야 하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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